1900년대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 우리암·우광복 부자의 후손들이 지난주 한국을 방문했단 소식을 앞서 보도해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암우광복기념사업회가 후손들을 초청한 건 우리나라에 두 선교사의 선교 업적과 희생정신을 알리기 위해선데요. GOODTV뉴스는 광복 77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사랑한 우리암 선교사 부자의 선교 흔적을 따라가봤습니다.
김민주 기잡니다.
[기자]
프랭크 윌리엄스, 미국 댄버대학교를 졸업한 23세 청년은 아내 앨리스 베이트와 함께 미국 북감리교의 파송을 받아 1906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합니다.
장티푸스로 사망한 로버트 샤프 선교사의 후임을 맡아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부임했습니다.
‘우리암’이란 한국이름을 가진 그는 1940년 일제의 강압으로 추방되기까지 34년간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펼쳤습니다.
우리암 선교사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미국이름보다 우리암으로 불리는 걸 좋아했으며, 장남 조지 윌리엄스에게 조선의 광복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아 ‘우광복’이란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힘썼던 건 명맥이 끊어진 공주의 기독교 학교를 재건해 나라를 구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 이용환 교장 / 공주영명중·고등학교 : (1900년대 공주는) 서당 수준의 기초 학문을 지역별로 이렇게 하던 그런 시대였고요. 근대 교육은 샤프 선교사님과 사애리시 선교사님이 오셔서 만든 명설남학당, 명선여학당이 최초였습니다. (흩어졌던 이 두 학교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합법적인 인가를 받은 학교를 만든 것이 1906년 10월 15일 지금의 공주 영명중·고등학교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겠습니다. ]
우리암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는 충남 지역에 기독교 신앙과 신문화, 신교육을 전파했으며, 1만7천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황인식, 조병옥 선생과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최초의 여자경찰서장인 노마리아, 최초의 여성 감리교 목사 전밀라가 대표적입니다. 또 10명의 감리회 감독을 배출했습니다.
[ 이용환 교장 / 공주영명중·고등학교 : (교육 목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을 기르자’ 이런 메시지가 있는데 두 번째가 뭐냐면 ‘나라와 민족, 겨례를 위해 몸 바칠 수 있는 애국자를 기른다’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한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우리암) 교장선생님께서 지원해 주신 거죠. ]
영명중·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공주 선교사묘역입니다. 우리암 선교사의 아들 우광복과 한국에서 11살 때 세상을 떠난 딸 올리브가 나란히 묻혀 있습니다.
우광복은 1994년 미국에서 별세하기 전, 여동생 올리브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우리암 선교사의 큰 아들 우광복 의사가 묻혀 있는 묘입니다. 우광복은 미 군정 당시 하지 중장의 통역관으로 한미 동맹과 정부수립에 기여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우광복은 영명학교를 다니다 14살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의사가 됐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미 해군 군의관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습니다. 이후 하지 중장의 비서실장격으로 미 군정과 함께할 한국 고위직 50명 가운데 35명의 기독교인을 추천했습니다.
한편, 우리암 선교사는 1962년 79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암 선교사 가족의 사랑과 헌신은 오늘날 영적 축복을 누리고 있는 후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